문학/단편 소설

첫사랑 [소설]

약한소리뱉기 2023. 9. 27. 09:11

-1-
 

"선생님 내일이 방학식인데 오늘 굳이 수업을 해야 하나요?"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당돌한 성격의 민수가 손을 들고 얘기했다.
학생들은 각자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말을 대신 말해주는 민수에게 고마움과 상황이 웃겨 저마다 킥킥대며 웃었다.
"야 왜 이제 그 말을 하냐, 각자 자습하도록"
기다렸다는 듯 수학 선생님은 책을 덮고 곰 같이 둔한 몸을 의자에 기대었다. 
뒷자리에 앉아있던 학생들은 제각기 떠들고 교실 창문으로는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후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고 수학 선생님은 벌떡 일어나 아무 말 없이 교실을 나섰다.
눈치를 살피던 종현은 복도로 따라 나가 선생님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학교 도서관은 오늘까지 개방되는 건가요?"
수학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다시 등을 돌렸다.
학교 규모가 작고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이 드물기에 방학기간 동안은 도서관이 문을 닫기로 되어 있었다.
 
 
수업이 끝난 이후 종현은 도서관에 달려가 책장을 거의 다 넘긴 책을 한 권 꺼내 소파에 눌러 붙었다.
자세를 잡고 책갈피를 한 장 넘기자마자 도서관 문이 열리며 수학 선생님이 들어왔다.
"그 종현아, 내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도와줄 수 있겠니?"
옛날에는 사서 선생님이 따로 있어 학교 도서관을 관리하였지만
이후 교내 학생 수가 줄어들어 도서관 관리에 필요성을 잃었고 
현재는 사서 선생님을 따로 구하지 않고 수학 선생님이 담당배정받아 관리하고 있었다.
"나랑 같이 도서관 정리만 조금 하자, 봉사시간은 3시간으로 채워줄게"
"네, 좋아요!"
"나는 잠시 교무실 좀 다녀올게"
수학 선생님은 가느다란 두 눈을 꿈뻑거리며 도서관을 떠났다.
종현은 쌓여있는 도서들을 표기순에 맞게 책장에 정리하던 중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고
고개를 돌린 종현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책장 정리에 열중했다.
쌓여진 도서들은 대부분 학습 만화였기에 정리가 수월했다.
그때 책장 저 너머에서부터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확실하다고 느낀 종현은 하던 일을 멈춘 채 소리의 근원지를 조심스레 따라가 보았다.
반대쪽 창가에서 까맣게 둘러싸인 두 눈이 종현을 지켜보고 있었다.
"애옹"
종현이 가까이 다가가자 고양이는 외마디 울음소리와 함께 창 밖으로 떨어졌고
창 밖에 고개를 내민 종현은 주변을 확인해본 후 무심하게 창문을 닫았다.
"별 일이 다 있네."
종현은 정리하던 자리로 돌아가려다가 도서관 문 근처에 떨어져 있는 공책을 발견했다.
첫 장을 넘기자 '주혁이에게'라고 적혀있었고
누군가가 직접 쓴 일기장 같아 보였다, 하지만 보통의 일기장은 아닌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이 내 병은 고칠 수 없다고 했어, 두 달 정도라니 너무한 거 아니야?! '
책장을 넘기자 눈에 띈 자극적인 문장에 종현은 책상에 기대어 일기장을 읽기 시작했다.
"종현아 뭐 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수학 선생님이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 죄송해요 바닥에 떨어진 공책을 주우려다가... "
종현은 자신이 무례한 행동을 범했나 싶어 얼른 일기장을 선생님께 건넸다.
"어디까지 읽었어?"
"아뇨 아무것도 안 읽었어요!"
수학 선생님은 살며시 웃으며 얘기했다.
"종현아, 첫사랑 얘기 해줄까?"
종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10년 전 이 학교에는 유난히 내성적이던 학생이 한 명 있었어"
 
 
 
 

-2-
 

 
 
 "오늘로만 벌써 묻지마 살인사건이 4번째예요!
정부는 대체 뭘 하는 거죠? 시민들이 죽어나가는 걸 구경만 하고 있잖아요!"
청담동 헤어숍에서 방금 막 세팅을 마친 듯 한 머리를 흔들며
병원로비의 TV속에선 야당대표가 눈물로 호소하고 있었다.
진료대기를 위해 의자에 앉아 있던 주혁은 아무 말 없이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툭'
한 여학생이 빠른 걸음으로 앉아있는 주혁의 앞을 지나치며
책을 한 권 떨어뜨렸다.
주혁은 책을 얼른 주워 떨어뜨린 여학생에게 돌려주려 하였지만
그 여학생은 순식간에 달아나 차마 말을 걸지 못한 채 멀어졌다.
'쟤는 우리 학교 여자애였던가..'
주혁은 호기심에 책을 펼쳐 들었다.
책 표지에는 <일기>라고 적혀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내 병은 고칠 수 없다고 했어, 두 달 정도라니 너무한 거 아니야?!'
일기장을 담담하게 읽어 내렸다.
"어라 벌써 읽었어? 돌려줄래?"
보영은 미소를 지으며 주혁에게 일기장을 건네받고 등을 돌렸고 
주혁은 당돌하게 멀어져 가는 보영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주혁은 평소 말이 없고 책 읽는 걸 즐겨하는 그런 아이였다.
그렇게 방과 후에 친구들과 놀지 않고 학교 도서관에만 들리다 보니
자연스레 사서 선생님의 눈에 들었고 그는 도서부원이 되었다.
어느 날,  보영이 도서관에 앉아있던 주혁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 나도 도서부원 시켜줘"
주혁은 두 눈을 깜빡거리며 의아해했다.
"내가 왜?"
"그야.. 너랑 친구 하고 싶어서?"
똘망똘망한 두 눈을 부라리며 보영이 주혁을 바라보았다.
"오늘 저녁 7시 오거리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자!
주혁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보영은 웃으며 뛰어나갔다.

 
 
오후 7시가 되기 전 주혁은 카페에 먼저 도착해 아이스티를 한 잔 시켜 자리를 잡았다.
갑작스런 약속에 나와버려서 멋쩍어하던 주혁이었다.
"오오 나 기다려준 거야? 감동이야!"
보영이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카페에 나타났다.
"그야... 약속시간 전에는 미리 나와야지..."
주혁이 뻘쭘해하며 말을 하자 보영은 꺄르륵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너 일기장 내용은.."
"아 뭐 맞아 사실이야 그런데 학교 애들한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아직 너랑 내 부모님 밖에 모르거든.."
주혁은 학교에 말을 섞는 친구 한 명 없어 소문을 낼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할 계획이야...?"
"뭘 어떻게 해?"
"두.. 달이라며..."
"딱히 생각한 건 없어.. 그냥 학교 다닐 거 같은데..?"
"뭔가 보람찬 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 여행이라던가..."
"여행 좋다! 나랑 같이 데이트하지 않을래?"
주혁이 당황한 채로 보영을 쳐다보자
보영은 가방에서 일기장을 꺼내 페이지를 넘기더니 버킷리스트가 적힌 장을 펼쳐 '데이트하기'라고 펜으로 적었다.
"버킷리스트가 너무 즉흥적인 거 아니야?"
주혁이 말하자 보영은 아무렴 어떠냐는 듯이 넘겼다.
"너네 여기서 뭐 해?"
슬기는 우연히 카페에 들렀다가 둘을 발견하고 쏜살같이 달려온 직후였다.
보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기장을 주섬주섬 가방에 집어넣고 말했다.
"안녕!"
"안녕은 무슨 네가 왜 여기 남자애랑 같이 카페에 있어? 넌 누구야?"
슬기는 빨개진 얼굴로 씩씩대며 따지기 시작했다.
주혁은 당황하여 보영에게 도와달란 눈빛으로 빤히 쳐다봤다.
"음.. 이번에 새로 사귄 친구야! 이름은 주혁이고, 주혁아 얘는 슬기야 서로 인사해!"
슬기는 잔뜩 화가 난 채로 카페를 떠났다.
"미안, 슬기랑은 세상에 둘도 없는 절친인데 말도 안 하고 너랑 만나느라 화가 났나 봐 히히"
보영은 당황한 듯 큰 눈으로 애교를 부리며 설명했다.
"그럼 쟤한테는 너 병에 걸렸다는 말 안 해...?"
주혁이 조심히 물었다.
"응... 아직... 이 사실을 말해주면 아마 슬기가 울고불고 너무 힘들어할 것 같아..."
"네가 제일 힘들면서 누가 누굴 걱정해?"
".... 하지만 나중에는 말할 거야! 지금은 아닌 것 같아서 좀 미뤄두려고 해.."
 
 
 
 
 
종현이 이야기에 집중한 표정으로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된 건가요?"
수학 선생님이 소파에 앉아있는 종현에게 아이스티를 한 잔 타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그렇게 그 둘만의 비밀 데이트가 시작되었지"
 
 
 
 
 
 
토요일, 약속된 시간에 맞춰 주혁은 자리에 만나기로 한 장소에 서 있었다.
보영 또한 금방 도착해 주혁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오늘도 나를 기다려주었구나!"
주혁은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둘은 선선한 바람을 마주하며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나랑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네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절친과 보내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오래된 생각이다"
주혁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보영을 바라보았다.
"슬기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여행을 가자하면 아마 한 발자국도 못 내딛고 슬퍼할 거야
하지만 너는 달라, 진실된 마음과 투명하게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좋아, 그러니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주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제 학교에 있을 때 슬기라는 친구가 나한테 찾아왔었어, 너한테 허튼짓 하면 죽여버린다더라"
보영은 진지한 표정에서 그의 말을 듣자마자 웃음을 내뱉었다.
"정말 슬기가 너한테 그렇게 말했어? 진짜 웃기다 킥킥
그런데 너 슬기 너무 미워하지 마, 슬기가 질투가 엄청 많고 겉으로는 세 보이지만 속은 완전 여리고 착하단 말이야 그러니 귀엽게 봐줬으면 해"
"알겠어, 그래도 걘 좀 꺼림칙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무서워..."
보영은 강아지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주혁을 바라보았다.
"우리 다음 주에 서울여행 갈래? 나 아직 한 번도 못 가봐서 꼭 가보고 싶었어"
"그럼 슬기가 두 눈이 뒤집어질걸?"
"몰래 가야지!! 부모님도 속이고 슬기도 모르게!"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공원 벤치에 앉아 서울 여행에서 할 것, 먹을 것 등등 계획에 대해서 다정히 얘기를 나누었다.
주혁은 이때 보영의 밝고 희망찬 눈빛을 보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럼 우리 최대한 일찍 출발하자 오전 6시에 출발하는 기차가 있어"
보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종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쌓여있는 책을 더듬으며 말했다.
"선생님, 그래도 그 소녀는 병에 말끔히 나았겠죠?"
선생님은 창 밖을 응시하며 부정하듯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끝내 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었어"
종현은 의아해했지만 굳이 표현하지 않고 끄덕거렸다.
"그렇게 그 소년과 소녀는 서울여행만을 기다렸지"
 
 
 
주혁은 서울여행을 가기 전 날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보영과 함께 만나고 함께 여행을 가고 그녀의 눈웃음을 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이것이 사랑일까,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주혁은 가슴이 요동쳤다.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로운 해가 떠올랐다.
아침 일찍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주혁은 서둘러 준비를 끝내고
집 밖으로 나가기 전 휴대전화로 메시지창을 열었다.
'보영아 나 이제 출발해, 얼른 너를 보고 싶어'
전송버튼을 누르려니 손가락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얼른 메시지를 지운 뒤 약속장소인 기차역으로 떠났다.
그렇게 주혁은 기차역에서 오지 않을 보영을 기다렸다.
10분이 흐르고
30분이 흐르고
1시간이 흘러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오늘따라 도로를 달리는 사이렌소리가 크게 들렸다.
 
 
 
 
 

-3-
 
 

주혁은 연결이 되지 않는 휴대전화를 귀에서 떨어뜨린 후 
불안한 마음을 삼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간 주혁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은 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소리가 주혁의 귀에 걸쳤다.
얼른 거실로 뛰어가서 TV를 보고 주혁은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느낄 새도 없이 주저앉았다.
'금일 새벽 기차역 근처에서 묻지마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피해자는 여고생으로 많은 이들에게 안타까움을.....'
주혁은 포효했고 맑고 쨍쨍한 하늘에는 왠지 밝은 별이 하나 떠있었다.
 
 
 
 
종현은 당황한 표정으로 선생님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자 금세 눈을 내리깔았다
"..."
"그래도 그때 기차역 주변을 배회하던 묻지마 살인마가 운 좋게 경찰에게 잡혔지"
"다행...이네요..."
수학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윽고 종현은 선생님에게 살며시 물었다.
"그런데 이 슬픈 소녀와 소년의 이야기가 선생님의 첫사랑이 맞나요...?"
선생님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종현아 나머지 책 정리는 내가 할 테니 넌 이제 집으로 돌아가렴"
"네 고생하세요"
종현은 가볍게 인사한 후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이게 왜 선생님의 첫사랑이야기 일까?'
라며 속으로 생각하며 복도를 걷다가 올해 새로 부임한 국어 선생님을 만났다.
"너 이름이... 종현이... 맞나? 혹시 수학 선생님 어디 계셨는지 아니?"
종현은 도서관에 있다고 알려주고 그를 지나쳤다.
 
 
 
 
슬기는 두 사람의 데이트 장소를 따라나섰다.
둘이서 나란히 공원을 걷는 모습을 실제로 보자 질투심이 솟구쳤다.
'이제 와서 날 버리겠다고...?'
가슴속에서 분노인지 무엇인지 모를 어떠한 감정이 가득 차 슬기는 머리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들을 미행하며 우연히 여행 날짜와 계획을 들었다.
슬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학 선생님은 도서관 소파에 앉아 일기장을 한 장씩 넘기며 읽고 있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졌고 그날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질투심과 분노에 가득 찬 그 날
새벽에 꽃단장을 하고 데이트를 나서는 그녀를 보고 눈물을 흘리던 날
집에서 식칼을 챙겨 온 그 날
그 날은 보영이 유난히 예뻐 보였다.
검붉은 피를 머금은 채 나를 노려보던 그 강아지 같은 눈망울조차
 
'보고 싶어....'
 
 
 
 
 

도서관 문이 열리고 국어 선생님이 들어왔다.
"슬기쌤, 퇴근하신 줄 알았는데 아직 학교에 계셨네요? 교무실에 물건 두고 가신 것 같아서 찾아드리려고 가져왔어요
그런데 지금 울고 계신 거예요?"
슬기는 일기장을 재빠르게 가방 속에 숨겨 넣고 환한 미소로 답하였다.
"앗, 아니에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주혁쌤 고마워요"
 

728x90
반응형

'문학 > 단편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캣 [소설]  (0) 2025.03.15
택시 [소설]  (4) 2023.10.30
학교 [소설]  (2) 2023.08.18
변장술의 귀재  (0) 2023.08.09
마피아 게임  (0) 2023.07.20